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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일본 3.11 대지진 피해복구를 담당하는 마쓰모토 류 장관이 사퇴했습니다. 갖가지 실언으로 물의를 빚은 탓인데요. 이날 사퇴 기자회견에서도 깜짝 발언을 했습니다. “제 혈액형이 B형이라 성질이 급하고 충동적이어서, 제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 언론과 외신들의 상반된 반응이었습니다. 일본 미디어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 발언을 기사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BBC를 비롯한 외신들은 그의 황당한 변명을 ‘일본의 혈액형 성격론’에 대한 맹신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꼬집었습니다.
‘혈액형 성격론’은 전 세계적으로 일본과 한국, 대만에만 있지만, 일본이 ‘원조’ 답게 그 믿음의 뿌리가 깊고, 정도도 가장 심합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고정관념은 “A형은 소심하지만 꼼꼼하고 성실하다, B형은 낙천적이지만 자기주장이 강하다, O형은 고집이 세지만, 대인관계가 원만하다, AB형은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참신하다” 등입니다.
1990년대 미쓰비시 전기가 “AB형은 기획력이 뛰어나다”며 AB형으로만 프로젝트 팀을 꾸린 일은 유명합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홈페이지에 “입사 면접에서 혈액형을 물어보면 안 된다”라고 명기하고, 발각된 회사에는 시정 권고 조치를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신입사원을 뽑을 때 혈액형을 물어보는 회사가 있고 실제 당락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혈액형 성격론’이 자리 잡은 데는 1970년대 방송작가인 노미 마사히코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의 주장이 담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사회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2004년 한 해엔 혈액형 관련 방송 프로그램이 무려 70개나 쏟아지기도 했죠. 신드롬이 일면서 일본 심리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초기에는 이론의 신빙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는데, 연구 결과는 일관되게 “혈액형과 성격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은 아직도 여전히 ‘혈액형 성격론’을 믿습니다. 2008년 야후 재팬 조사에선 66%의 일본인이 혈액형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고, 다른 연구에서도 80%가 넘는 일본인이 ‘혈액형을 통한 성격 판단이 흥미롭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학자들은 연구방향을 돌렸습니다. 이번엔 왜 일본인이 ‘혈액형 성격론’을 신봉하는지, 그 심리구조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학자들은 크게 3가지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가 ‘바넘 효과’입니다. ‘바넘 효과’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성격적 특징을 자신에게만 해당된다고 믿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은 쾌활하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할 때도 있다”라고 말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라며 신기해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확증 편향’으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믿는 혈액형 성격과 맞는 사람이 있으면 “역시 내 생각이 옳아”라며 더 굳게 믿지만, 반대 사례가 나타나면 “저 사람은 예외야”라며 제외하는 식입니다. 이래서는 어떤 진실에 대해서도 귀를 닫아버리겠죠. 세 번째는 ‘자기 이행적 예언’입니다. 아무리 근거가 없더라도 정말 사실이라고 굳건히 믿고 행동하면, 정말 자기가 믿었던 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죠. 원래는 A형 성격이 아니었던 사람이 A형 성격론을 굳게 믿으면, 실제 성격도 A형 성격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심리적 현상, 어쩐지 익숙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점을 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죠. 점쟁이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로 ‘용하다’는 감탄을 이끌어내고(바넘 효과), 믿는 만큼 보이게 만들며(확증 편향), 스스로 그 예언대로 따라가도록 만드니까요(자기 이행적 예언).
혈액형 성격론이 엉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많은 일본인이 그것을 ‘진짜’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진짜’ 위력을 발휘해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브라 하라’ 즉, ‘혈액형 괴롭힘’ 문제입니다. 사회심리학자 야마오카 시게유키가 혈액형별 이미지 변화 추이를 조사했더니, B형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에서 B형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한데, 이 때문에 절반이 넘는 B형이 불쾌한 경험을 자주 겪고, 심할 경우 차별과 따돌림까지 당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실제 취업과 연애에서도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왜 유독 일본 사회에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BBC는 “일본이 획일적인 사회여서 혈액형 성격 분류가 인기를 끄는 것 같다. 혈액형 분류를 통해 그나마 사람들 간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서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습니다. 또 일본은 A형이 다수여서 호감을 얻고, B형과 AB형은 소수여서 차별받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인은 프라이버시 관련 질문은 무척 삼가지만, 혈액형 관련해서는 비교적 거침없이 묻습니다. 날씨 인사와 더불어 가장 공통화제로 삼는 질문일 정도죠. 대신 농담 반 진담 반 식입니다.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맞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도 많고, 혈액형을 통해 상대방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이도 적지 않죠. 따라서 혈액형 성격론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고, 뜻밖에 상대방 성격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인에게 혈액형은 우리보다 조금 더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단 혈액형 성격론에 대해 논쟁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인도 대부분 혈액형 성격론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심정적으로 믿을 뿐이죠. ‘혈액형 성격론은 엉터리’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마시고, 유쾌하게 대화를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2015년 한 IT업체가 한 일 양국의 SNS 내용을 빅데이터로 분석해보니 한국인은 B형 성격에 호의적인 반면에, 일본인은 A형 성격에 호의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 사회는 ‘개성’과 ‘자기주장’에 대해 높은 점수를, 일본 사회는 ‘꼼꼼함’과 ‘성실함’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죠. 혈액형 성격론에도 한일 간 차이가 나타난다는 점이 참 흥미롭습니다. 서로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