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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나 호주, 뉴질랜드에 가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집니다. 정부 사무실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사진이 걸려 있기 때문이죠. 지폐나 동전, 또는 우표에도 여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를 보고 “이상하다. 왜 이 나라에 영국 여왕의 사진이 걸려 있을까?”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적지 않은데요. 영국 연방국가에서 비즈니스 할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해 잘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기본 상식입니다. 오늘의 포스팅 주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 한 나라 만의 군주가 아닙니다. 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 등 16개 나라의 군주이기도 합니다. 영연방 왕국 16개국을 합친 면적이 1870만 km²으로 러시아보다 넓으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의 군주라고 할 수 있겠죠. 이들 나라는 파푸아 뉴기니를 빼고는 과거 영국 식민지였다가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입헌군주국은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선거로 뽑은 국민대표가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지만 세습 군주를 따로 두고 상징적인 국가원수의 역할을 맡깁니다. 여기서는 이 세습 군주가 바로 영국의 군주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같은 군주, 다른 나라의 개념입니다. 여왕은 이들 나라에 머물지 않는 대신, 대리자인 총독(Governor-General)을 파견합니다. 총독은 해당 국가에서 정치적인 실권은 전혀 없지만 여왕을 대신한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급료와 대우는 상당하죠.
이렇게 영국 군주를 자국 군주로 모시는 나라는 ‘영국 연방 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영연방 왕국은 공공기관에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진을 모시고, 화폐와 우표 등에서도 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했는데, 군주는 계속 같은 사람을 모신다는 건 우리 입장에선 이해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 나라는 분명히 독립국가이고 주권국가입니다. 그 나라의 특수한 역사가 만든 상황일 뿐입니다. 행여 우리 기준으로 “독립국가가 아니다”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영연방 왕국과는 별개로 영국 연방이라는 별도의 국제기구가 있습니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53개 국가로 이뤄졌는데요. 아직은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통합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이처럼 16개국의 군주인 것은 물론 53개국으로 이뤄진 영연방의 수장이라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군림만 하고 통치는 하지 않지만 그분의 동정에 전 세계가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여왕의 위력은 아직도 해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과 1976년 캐나다의 몬트리올 여름올림픽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개막선언을 했습니다. 여왕은 이로써 서로 다른 두 나라에서 개막선언을 한 최초의 국가원수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영연방왕국의 일원인 캐나다에서 여왕이 국가원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여왕을 중요한 국사에 모시는 것은 여왕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영연방왕국에서 여왕은 단순한 국가원수나 상징을 넘어 생활의 한 복판에 있는,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비즈니스를 할 때 존경심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 비즈니스와 관련한 공식 기념 촬영은 여왕 사진 앞에서 하는 것이 기본 매너입니다. 여왕이나 왕실에 대한 농담이나 가십도 삼가야 하고요. 영국에선 공식 건배사는 사실상 단 하나입니다. 정치인이나 행정가는 물론 심지어 대학생들까지 이렇게 건배를 한다고 합니다. ‘To the Queen’, 즉 ‘여왕님께’라는 뜻입니다. 이들 나라 출신의 인사들과 건배할 때 ‘To the Queen’이라고 해주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왕이 이렇게 존경을 받게 된 연유는 왕위 계승자 시절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0년 14살의 앳된 엘리자베스 공주는 BBC방송의 어린이 시간에 나와 폭격을 피해 시골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또래 어린이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1943년 17살 때는 근위보병연대를 방문하면서 공식 행사장에 처음으로 혼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 해 전에 그 부대의 명예 연대장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입니다. 영국 군부대는 전통적으로 왕족이 명예 부대장을 맡습니다. 18살 때인 1944년 7월에는 전쟁이 한창이던 이탈리아를 방문해 전선의 군인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1945년 2월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운전, 탄약관리 등을 맡는 여성국방의용군에 입대한 것입니다.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훈련을 받은 후 군용 트럭 운전병 및 수리병으로 근무했습니다. 여성 왕족 가운데 일반 군인과 똑같이 훈련을 마친 후 군 복무를 한 사람은 지금까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당시 공주가 바닥에 꿇어앉아 트럭 바퀴를 교체하거나 트럭을 수리하는 흑백 사진이 공개돼 국민의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어울리는 도덕적인 의무를 다하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지요.
이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역사와 위상을 잘 알아두면 국제 비즈니스에서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영연방왕국에서 비즈니스 행사를 할 때 여왕을 대리하는 총독이 방문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이니 이에 맞춰 예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연방왕국이라는 독특한 정치체제와 전통, 문화를 이해하면 비즈니스 상대와 서로 소통하기도 수월해질 겁니다. 물론 왕실과 관련해 괜히 말실수해서 어색해지는 일도 없겠죠. 마지막으로 영연방왕국에서는 다 같이, ‘To the Queen’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