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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맥이나 순발력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국인이 있는데요. 오늘은 중국인에게 ‘장사의 신’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장사꾼의 전설을 소개하겠습니다. 폭력과 배신이 난무하던 19세기에 맨주먹으로 일어나 오로지 신용과 신의만으로 중국에서 전무후무한 정 1품 홍정 상인의 지위에 오른 인물, 후쉐옌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중국 비즈니스의 한 수가 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짚어보겠습니다.

 

후쉐옌은 1823년 안휘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항저우에 있는 신화 전장에 들어가 청소,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장이라고 하면 지금의 은행과 같은 곳인데요. 후쉐옌은 탁월한 영민함과 숫자 감각 그리고 빠른 눈치 덕에 몇 년 후 정식 사환이 됩니다. 그러면서 돈의 가치, 흐름 그리고 투자의 기본 개념을 익혔죠. 그러던 중 왕여우 링(王有齡)이라는 가난한 유학자를 만나게 됩니다. 왕여우 링의 사람됨을 단번에 알아본 후쉐옌은 전장에서 발행한 어음으로 거금 은자 500냥을 조건 없이 내어줬는데요. 이 일로 후쉐옌은 전장에서 쫓겨났지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죠. 결국 왕여우 링은 후쉐옌의 예측대로 저장성의 재정담당관으로 금의환향했습니다. 왕여우 링의 후원을 받게 된 후쉐옌은 군량미를 납품하고 부강 전장’이라는 이름의 전장을 직접 세우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죠.

 

물론 처음에 후쉐옌이 왕여우 링이라는 실력자를 뒤에 업고 돈을 번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겐 보통의 장사꾼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는데요. 바로 신용과 의리입니다. 후쉐옌의 진면목은 그가 가난 탓에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세운 ‘호경 여당(胡慶餘堂)’이란 약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는 대문에 ‘계기(戒欺)’, 즉 거짓을 경계한다라는 의미의 현판을 상호보다 더 크게 제작해 걸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목숨과 직접 관련 있는 약국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 추구보다 손님에 대한 신용과 진심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후쉐옌은 호경 여당을 편의시설을 갖춘 깨끗한 공간으로 꾸미고, 3천여 종의 약재를 직접 구입하는 등 좋은 품질을 유지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약재실은 크고 넓게 그리고 손님들이 보이게 만들어 속임수 없이 진짜 약재를 판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공개했습니다. 또한 구급약을 상비해 돈이 없는 서민이나 걸인들이 찾으면 무료로 내어주었고, 인근 지역에 재난이 닥치거나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무료로 약사를 보내고 약재를 나눠주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런 약국이 19세기 중국에 있었던 것이죠. 물론 호경 여당의 질주를 시기한 몇몇 약국이 담합해 약값을 터무니없이 싸게 책정해 위기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후쉐옌은 오히려 ‘우리 약국은 약값 할인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간판을 걸었는데요. 이내 약의 품질 차이를 알아챈 고객들은 후쉐옌의 약국을 찾을 수밖에 없었죠. 훗날 후쉐옌이 파산한 후에도 호경 여당만은 유일하게 남아 후손들이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장사는 신용에서 결정 난다’는 후쉐옌의 경영철학 덕분입니다.

 

신용을 으뜸으로 여긴 후쉐옌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또 있는데요. 어느 날 태평천국 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뤄창 더(羅常德)란 군인이 10여 년 넘게 모은 돈 1만 2000냥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뤄창 더는 후쉐옌에게 “내가 전쟁터에 나가면 살고 죽고 것을 장담할 수 없으니 이자는 필요 없고 그저 다시 찾아오면 원금을 돌려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후쉐옌은 이자까지 쳐서 1만 5000냥을 주겠다고 약속했지요. 결국 뤄창 더는 전사했고, 고향 친구들이 그의 유언을 갖고 돈을 찾으러 옵니다. 그러자 후쉐옌은 증서도 없고, 예금주는 죽었으니 모른 척할 수도 있었겠지만 기꺼이 약속한 돈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일화는 중국 전역에 확산돼 군인들 사이에서 부강 전장은 ‘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전장’이라는 신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부강 전장은 자산 2,000만 냥이 넘고, 전국 지점망을 가진 중국의 최대의 돈 창고가 되었죠. 1867년 후쉐옌은 상인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정일품 관직에 올랐는데요. 홍색 정대를 매고 황마 패 모자를 쓸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얻어 홍정 상인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쉐옌의 사업은 끝내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권력싸움에 휘말린 후쉐옌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 1885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일어났다가 허망하게 끝나는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는데요. 물론 후쉐옌이 파산하지 않고 더욱 큰돈을 모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투쟁에서 누구 뒤에 서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는 돈만을 중시하는 평범한 상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외국 상인들에게 대항한 민족자본가로서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것이 결국 그를 파산과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훗날 그의 행적들이 밝혀지면서 ‘살아서는 활 재신(活財神)으로, 죽어서는 상업(商業)의 신(神)’으로 중국인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요.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도 중국의 상도(商道)를 집대성한 인물이고, 과거를 계승해 미래를 연 인물이며, 다시는 나오지 않을 그런 인물이라고까지 극찬할 정돕니다.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회장 또한 후쉐옌의 광팬으로 유명한데요. 마윈은 후쉐옌을 ‘선의 후리(先義後利)’, 즉, ‘먼저 의를 따르고 나중에 이익을 생각한다’는 중국의 ‘상도(商道)’를 세운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얼핏 보면 법이 통하지 않고 신용보다는 순발력이나 인맥으로 돌아가는 중국에서 신용을 지키는 것은 손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생각을 바꿔보시면 어떨까요? 역설적으로 중국 사회가 신용을 잘 지키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신용이 더 중요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신용과 신의가 있다는 평판을 얻는다면 중국 사업에서 절반은 성공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요. 실제 우리나라 어느 기업이 중국 공무원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사업을 철수했다가 나중에 그 공무원이 고위직으로 출세한 후 두고두고 딴죽을 거는 바람에 수천 억 원의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사례도 있죠. 뿐만 아니라 후쉐옌의 철학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 비즈니스에서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후쉐옌 삶을 통해 중국 비즈니스에서 신용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고, 지혜를 발휘해보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