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역사상의 대제국을 능가하는 다국적 대기업의 전성기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굴지의 대기업이 쇠퇴하거나 쓰러졌습니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구조조정, 다운사이징 등 생존을 위해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산업화 초기에는 시장이 성숙하지 못해 살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경영상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게 됩니다. 공장을 짓기 위해 건설 회사를 만들고 직원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급식 회사를 만듭니다.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소, 생산 인프라 구축을 위한 기계 설비 회사, 자금 조달을 위한 금융회사까지, 전방위 다각화가 이루어집니다. 대기업의 이러한 다각화와 수직계열화는 경제 사회 발전의 견인차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이 발전하면, 시장이 성숙되고 업종마다 수준 높은 기업들이 등장하여 점차 한 기업이 모든 것을 자체 조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전문기업들이 탁월한 품질을 달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츰 기업은 자신의 부가적 기능들을 조직에서 떼내어 시장에 맡기기 시작합니다. 시장이라는 대안 때문에 조직 내에서 해오던 모든 일들이 재검토됩니다. 대기업은 시장의 파도를 막아주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했는데, 이것이 구성원을 안일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조직이 관료화되고 '무사안일' '복지부동'의 태도가 퍼져갑니다. 이러한 질환이 누적된 결과 기업은 자의든 타의든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현재 기업이 직면한 환경 변화는 몇 가지 부가적 기능을 떼어내는 정도로는 대응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가 모듈화입니다. 모듈화는 기업의 밸류 체인이 레고 모형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고의 원리는 블록의 연결 부분, 즉 볼록하고 오목한 접촉부의 규격만 맞으면 어떠한 블록이라도 조립과 분해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블록은 색깔, 또는 크기나 모양이 달라져도 됩니다. 호환성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서 모든 블록은 서로 신경 쓸 것 없이 분산해서 만들 수 있고, 색깔이나 모양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밸류 체인이 모듈화 되면 각 단계의 전문기업들은 호환성을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혁신을 추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곧 복잡한 혁신도 한 기업의 중앙에서 통제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독립된 기업들이 각 분야를 전담하면서도 전체 프로세스가 끊김 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입니다. 리눅스는 전 세계 수많은 프로그램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지만 이를 중앙에서 통제하는 단일한 지휘부는 없습니다.

 

모듈화로 인해 시장의 힘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기업은 점차 부가 기능에서 핵심 기능까지 시장으로 돌려보내는 추세입니다. 제조업체인 애플은 제조기능을 모두 아웃 소싱했습니다. 이런 경향이 점점 더 심화되면 이제 기업은 마지막에 무엇이 남을까요? 핵심 브레인 몇 사람만 남아서 '전략 기획' 또는 '비즈니스 모델의 디자인'만을 담당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분할, 해체가 기업의 유일한 미래는 결코 아닙니다. 과거처럼 과도한 다각화나 수직계열화는 지속될 수 없지만, 축소지향이 유일한 방향은 아닐 것입니다. 혁신조차 시장 거래를 통해 가능하다고 해도, 혁신의 아이디어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근본적 혁신은 다시 통일된 기업의 리더십을 요구할 것입니다. 책 판매에서 시작한 아마존이 온라인 백화점, 클라우드 컴퓨팅, 디지털 디바이스, 엔터테인먼트에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기존 사업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역량으로 이제껏 존재하지 않던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하고, 생각지도 못한 시너지를 창출합니다.

 

앞으로 웅대한 아이디어로 생태계의 인프라를 제공하는 플랫폼 기업과 독자적인 강점을 가지고 특화된 기능을 제공하는 전문기업들이 시장을 양분할 가능성이 큽니다. 큰 그림을 그려가는 기업과 특정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생태계를 주도할 역량도, 세계 최고의 특화된 역량도 부족한 기업은 도태될 것입니다.

 

기업은 끊임없는 혁신, 즉 아이디어의 발굴과 실현을 통해서만 존재 의의를 가집니다. 지속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아무리 단단한 경쟁 우위의 아성도 버티지 못합니다. 풍부한 유동성, 튼튼한 지배구조, 견고한 브랜드 로열티. 이 모든 것들이 그다지 미덥지 못한 방어벽이라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성현은 2천 년 전에 이미 <일신 우일신>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혁신은 기업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루틴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정신만이 기업을 살아있게 만듭니다. 기업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떨어져 나갑니다.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 기업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혁신을 향한 열정과 도전의 정신입니다. 과연 우리 기업에는 혁신 의지가 살아 있는가, 다시 한번 깊이 자문하고, 새로움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시기 바랍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