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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국 위스콘신주 작은 마을에 사는 10대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이 소녀의 이름은 바브라 밀리센트 로버츠. 바브라는 넓은 뒤뜰에 개·고양이·조랑말을 키우고 주말에는 부모님이 사주신 핑크색 코르벳 자동차를 몰고 쇼핑을 나갑니다. 가끔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함께 요리를 하거나 TV를 보지요. 바브라는 사실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의 문화를 대변해 온 '바비(Barbie) 인형'의 본명입니다.
세계적인 완구회사 마텔의 공동 창립자인 루스와 엘리엇 핸들러 부부가 어린 딸이 인형을 가지고 어른 행세를 하며 노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성인 모습의 인형을 만든 것이 바로 바비인 것이죠. 1959년 첫 선을 보인 최초의 바비 인형은 금발에 잘록한 허리, 큰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얼룩말 무늬의 수영복 차림이었습니다. 장난감 유통업체에서는 바비 인형이 지나치게 선정적이어서 아이들 장난감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우려를 나타냈지만 바비 인형은 첫 해에 35만 개나 팔리는 인기상품이 됐습니다. 바비의 직업은 고졸 패션모델에서 시작해 항공기 승무원, 에어로빅 강사, 간호사 등을 거쳐 우주비행사·의사·카레이서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바비는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커리어우먼의 표상으로서 여자아이들의 역할 모델을 톡톡히 해 온 것이죠. 통계에 따르면 바비 인형은 전 세계 150개국에서 1초에 3개씩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마텔이 바비 수출로 거둬들인 연간 수입은 13억 달러였는데요, 특히 파생상품 매출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바비의 옷, 장신구, 다양한 형태의 인형 집과 가구세트 판매가 인형 자체 매출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니 패션 디자이너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50명, 헤어 디자이너 12명이 바비의 패션과 가구 디자인을 전담할 정도입니다. 바비 인형이 서구의 소비자본주의를 전파한다, 미(美)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와 같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56년 간 인형 업계의 여왕자리를 유지해 온 비결이지요.
그런데 이런 바비에게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비 특유의 요염한 표정과 과다 노출, 섹시한 자태 대신 검은색 긴 머리와 짙은 눈동자, 올리브색 피부에 온몸을 아랍 의상으로 감싼 무슬림 인형 ‘풀라’입니다. 중동지역에서만 자라는 향기로운 꽃의 이름을 따온 풀라는 중동지역에서 바비인형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풀라는 순진무구한 소녀의 눈빛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이슬람 여성들이 외출할 때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쓰는 히잡을 쓰고, 발끝까지 덮는 긴 외투 아바야를 입고 있어 바비 인형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소재 뉴 보이 토이즈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처음 출시된 풀라는 아랍권에서만 400만 개 이상이 판매되었고 인형 옷과 액세서리는 천만 개 이상 팔려나갔습니다. 현재는 무슬림 지역인 북아프리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는 물론 중국·브라질에도 수출되고 있습니다. 풀라의 탄생 배경에는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후 서방의 이슬람 폄하와 차별이 심화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이슬람의 정체성과 가치를 강조하는 아랍사회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방영 중인 풀라의 TV 애니메이션 광고는 풀라의 일상생활을 통해 이슬람 소녀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마음가짐과 행동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유행에 민감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때때로 요염한 눈빛이나 자세를 취하는 바비와는 달리, 풀라는 정숙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전통을 중시하고 예의 바른 소녀입니다. 풀라는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기도를 한 뒤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를 마친 뒤엔 코란을 읽고 여자 친구와 함께 쇼핑을 갑니다. 집 밖으로 나갈 때는 히잡과 몸 전체를 감싸는 아바야를 걸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아랍권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 선물로 바비 대신 풀라 인형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뉴 보이 토이즈 측은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아랍권 소녀들이 가장 동경하는 직업인 의사와 교사 풀라 인형을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이슬람 전통을 고려해 풀라의 남자 친구 인형 출시 계획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노동이나 작업과는 별개로 자발적인 놀이문화를 발달시키면서 놀이 도구인 장난감을 만들었고 어린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그 사회의 규범과 규칙, 관습 등을 배우고 익혀왔습니다. 장난감 하나에도 장난감이 탄생한 지역의 역사와 전통, 만들어질 당시의 사회상과 문화가 반영되는 이유이죠. 바비 인형이 이슬람 문화권에서 풀라 인형의 인기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은 풀라만큼 이슬람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고 현지와의 문화적 동화를 이뤄내는 것이야말로 모든 비즈니스의 시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