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언제부턴가 사회 곳곳에 ‘감정 노동’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카페에 가면 ‘이곳 직원은 소중한 누군가의 가족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면 당연히 모든 통화내역이 녹취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직장을 다니면서 일정수준의 ‘감정 노동’을 하고 삽니다. 특히 서비스업 쪽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직업들은 이 감정 노동의 끝판왕인 직업들입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친절한 서비스 제공이라는 회사의 모토를 위해 고객 응대를 위한 매뉴얼을 만듭니다. 그 매뉴얼은 디테일합니다. 손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해라. 고객이 물이 차다고 하면 따뜻한 물로 바꾸어 줄까요? 라고 물어 보아라 하는 식입니다. 비행기 타보면 딱 알 수 있습니다. 스튜어디스들이 정해진 매뉴얼을 지켜서 고객을 응대합니다.
사람은 감정 노동을 지속하게 되면 수동적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인간은 어떤 일을 내 의지로 하게 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한 감정노동을 요구받게 되면 이게 안 된다는 거죠. 매뉴얼에 이런 지침이 나와 있나 안 나와 있냐만 따지게 됩니다. 바로 영혼 없는 가식적인 친절함을 발휘하게 됩니다.
또 감정노동을 하는 그 순간은 고객의 감정에 나의 감정을 맞추어야 합니다. 고객이 컴플레인하면 속으로는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이리 난리냐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미안한 척 꾸며내야 합니다. 물론 서비스직이나 고객 응대 직업군이 아니더라도 우리들 모두는 직장에서 일정 부분의 감정 노동을 하고 삽니다. 내 잘못이 아닌데 상사에게 야단 맞을 때 억울하더라도 일단 ‘죄송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내 솔직한 감정이 아닌 사회와 조직이 요구하는 만들어진 감정에 깨춤을 추다보면 사람이 소진이 됩니다. 지치는 거죠. 기가 빨리는 거죠. 또 계속 이런 일이 반복이 되면 내가 아닌 만들어진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사회적 가면이라는 것을 쓰고 살아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는 거죠. 그리 되면 나의 내면의 자아와 외면의 자아가 분리가 된다고 할까요? 행복하지 않습니다. 바로 월급이라는 댓가로 이 힘든 감정 노동을 감당하고 사는 거죠.
실은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정 수준의 감정 노동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감정노동이고 이것을 내가 감당하고 사느라 힘이 드는구나 한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힘들고 소진되고 기가 빨리는 데 왜 이럴까 뭐가 문제일까 남들은 잘하고 사는데 왜 나만 이럴까 이러한 고민을 안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타고난 성향이 내성적인 사람들은 이런 감정노동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럴 때 내가 못나서 혹은 내가 일을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구나. 상황 상 힘들 수밖에 없구나. 특히 내가 내성적이라서 사람을 대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구나. 이리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객관성을 가지면 좀 견디기 수월해진다는 거죠. 혹은 이 직업이 정말 힘들다면 감정노동을 덜 요구하는 다른 직업군으로의 이직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감정 노동을 많이 하고 삽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끈끈한 가족 문화가 있습니다. 흔히 감정노동을 많이 하는 관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딱 짐작이 되시지요? 시대가 변해서 요새는 장모님과 사위와의 갈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장모가 만사 결혼생활을 간섭을 해서 힘들다고 병원에 찾아오는 남자분들도 많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한국의 가족 중심 문화, 장유유서 문화, 집단주의 문화에서 사적 감정노동을 하고 사는 것에 나도 모르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거 잘하면 예의 바르다. 가정교육 잘 되어 있다.. 이런 평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는 사회성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적 영역의 감정 노동이 가족을 넘어서 연인 관계로 확대가 됩니다. 연인이니까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해. 누구 다른 커플은 100일째 뭘 했다더라. 내가 아프면 새벽 4시라 할지라도 당연히 죽이랑 약을 사다가 줘야지.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연인 사이의 감정노동의 특징이 몇 개 있습니다.
첫 번째, 주로 또래 어울리는 사람들이 준거집단이 됩니다. 준거 집단은 내가 속한 집단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 삶의 여러 기준을 참고하게 되는 집단입니다. 어울리는 친구라든가 직장 동료라던가 같은 교회 사람이라던가 하는 집단들입니다.
두번째 이런 집단 내에서 뭘 어찌해야 한다더라. 는 나름의 당위 명제들이 있습니다. 행동 지침이라 할까요?
세 번째 준거 집단의 당위 명제들을 깊이 고민하지 않고 나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으로 가지고 와 버립니다.
서로 간에 기꺼이 해주는 배려나 챙김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혹시 나도 모르게 과한 감정 노동을 연인에게 요구하고 있지 않나? 하는 건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사적인 영역에서 감정 노동이 가치가 있을 때는 결과로서 관계가 돈독해진다던가 상대의 자존감이 올라간다던가 하는 식으로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즉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기꺼이 해주는 배려가 나의 연인을 행복하게 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당연히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래서 마지못해 뭔가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주위의 내 친구 남친은 혹은 내 친구 여친은 뭘 어떻게 해 준다더라. 이런 기준을 서로 간에 들이댈 필요는 없습니다. 연인은 두 사람 사이의 스페셜한 관계인 거지 준거 집단의 기준에 맞게 연애를 하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