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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미국에서는 4,000개 이상의 소매 매장이 새로 생겼지만, 그 배가 넘는 약 9,300개 매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백화점, 대형 할인점, 소규모 상점을 가리지 않고 이른바 '소매업의 종말'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데요, 미국 경제와 소비가 성장하는 상황에서도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전자상거래에 밀려 오프라인 소매업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는 중입니다. UBS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의류와 소비자 가전 분야를 중심으로 2026년까지 7만 5천 개의 매장이 퇴출될 것이라고 하는데요, 도심 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이들 매장은 정말 사라질 운명일까요? 아니면 다시 활기를 찾고 우리 소비 생활의 한 부분으로 남을까요? 경험과 데이터를 판매하는 소매 서비스 스타트업, 베타를 통해 소매업 부활의 가능성을 포스팅해보겠습니다.
이 회사는 이름부터 조금 특이한데요, 제품이나 서비스 출시 전에 소수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베타 테스트'를 살짝 꼬아서 회사명으로 삼았습니다. 베타는 2015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으로 혁신적인 IT 제품을 소비자가 직접 사용해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매장에 전시하는 소매업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다른 전자제품 판매점과 뭐가 다를까 궁금하실 겁니다.
첫 번째 차별점은 '매장 운영의 목적'입니다. 베타는 매장 공간을 제품 판매가 아니라 철저하게 '소비자의 경험'을 위해 운영합니다. 진열대라기보다는 책상처럼 생긴 탁자 위에 제품을 놓고, 그 옆의 태블릿을 통해 제품 사용법과 특징을 설명하고 가격을 보여줍니다. 매장을 방문한 소비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제품을 사용해볼 수 있습니다. 절대로 구매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블릿으로 아마존이나 베스트바이의 판매 가격과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음껏 써 보고 괜찮으면 싼 곳에서 사라는 말이죠. 또한, 물건을 팔기보다 소비자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점원들은 베타테스터라고 불리며 제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소비자의 경험을 돕는데요, 매장 방문 전에 예약을 하면 45분간 베타테스터와 함께 제품의 모든 것을 파헤쳐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책 없이 운영되는 매장에서 베타는 어떻게 돈을 버는 걸까요? 베타의 두 번째 차별점은 '수익 모델'입니다. 베타는 제품 판매로 돈을 버는 매장이 아닙니다. 매장에서 제품이 팔려도 판매 수수료를 받지 않습니다. 대신 제품을 입점시킨 고객사로부터 '구독료'를 받습니다. 무슨 구독이냐고요? 소비자의 반응, 즉 행동 데이터를 고객사에 판매해 데이터 구독료를 받는 겁니다. 매장 천장에 달린 수십 대의 특수 카메라가 소비자의 성별과 연령대, 어떤 제품에 얼마나 관심을 표시하는지 등을 추적하고, 점원들은 소비자와의 대화를 통해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느낌이나 평가를 수집합니다. 고객사는 제품 당 월 2,000달러 수준의 구독 수수료를 지불하고 이런 데이터를 얻는 것이죠.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일수록 베타를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제품 홍보와 소비자 반응 청취를 한꺼번에 달성하면서 유통과 판매에 자원을 분산시키지 않고 제품 개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소매 사업자라면 소비자에게 경험을 제공하며 수집한 데이터로 수익을 창출하는 베타의 사업 방식에 관심이 많겠지만 사업 체질이 다르고 역량이 부족해 도입이 쉽지 않을 겁니다. 이 점에서 출발한 베타의 세 번째 차별점은 바로 '사업 모델의 상품화'인데요, 베타는 소매 서비스를 마치 소프트웨어처럼 개발해 판매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베타는 디지털화된 매장을 통해 소매업을 서비스하는 자신의 사업모델을 'Retail-as-a-Service'라고 부릅니다. 소매를 누구나 쓸 수 있는 서비스 상품으로 제공하는 것이죠. 소프트웨어를 클라우드 상에서 사용하는 Software-as-a-Service나 이동수단을 제공하는 Mobility-as-a-Service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베타는 데이터 기반 소매업의 기술 플랫폼과 노하우를 하나의 설루션으로 판매합니다. 이 설루션을 도입하면 다른 기업도 베타처럼 매장을 운영하며 소비자의 데이터를 재고 관리, 가격 결정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죠. 실제로 미국 대형 백화점 체인 메이시스도 베타의 기술과 소프트웨어에 기반해 숍인 숍 형태의 매장을 구축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베타는 현재 미국에 22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데요, 각 매장의 월평균 방문객은 2만 5천 명에 달합니다. 또한 파산한 장난감 회사, 토이저러스를 인수한 트루 키즈와 조인트 벤처를 만들어 체험 매장을 준비하는 등 소매 서비스를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는 중입니다. 2019년 11월에는 미국 LA에 패션 매장인 '포럼'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IT기기를 주로 취급했던 베타가 의류 소매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옷을 걸어 전시하는 행거를 디자이너에게 임대해 주고, 옷에 부착된 RFID로 어떤 손님이 어떤 옷을 입어보는지 데이터를 수집한다고 합니다. 감성적이고 유행을 타는 패션 분야에서도 베타의 디지털 역량과 소매 서비스 사업모델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베타의 시도는 오프라인 매장이 제품을 경험하는 곳으로 진화해 살아남을 수 있을지 판단할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