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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휘발유 때문에 살인을 하고 있다." 핵전쟁 이후 물과 석유를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배경에서 전개되는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등장하는 말인데요. 널리 알려진 로마클럽 보고서도 석유의 고갈을 예견하며 현대 경제와 인류가 한계에 봉착할 거라고 주장했죠. 때문에 상식적으로 천연자원이 풍부할수록 인류가 살아가고 경제활동을 영위하는데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상식에 반기를 든 경제학 이론이 있습니다. 바로 "자원의 저주"라는 이론입니다.
"자원의 저주"라는 개념은 1980년대에 처음 등장했는데요, 천연자원이 많은 국가가 적은 국가보다 오히려 경제성장이 느리고 열악한 발전상을 보인다는 이론이죠. 영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오티가 1993년에 "자원의 저주"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후 경제발전론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졌습니다. 특히, 제프리 삭스와 앤드류 워너의 1995년 논문은 자원의 저주 이론을 실증분석을 통해 뒷받침한 최초의 논문으로 평가되는데요, 1971년 기준으로 GDP 대비 자원 수출비중이 높은 국가는 1971~89년 기간에 1인당 GDP 성장률이 낮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한편, 길 파손은 1965년부터 1998년까지 석유수출국 기구에 속한 국가들은 1인당 GDP가 연평균 1.3% 감소한 반면, 나머지 개발도상국들은 연평균 2.2% 성장했음을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자원의 저주를 뒷받침하는 여러 연구들이 발표된 이후, 삭스와 워너는 한 논문에서 "천연자원의 저주를 입증하는 실증적 증거는 비록 방탄은 아니지만, 상당히 강력하다."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경로도 여러 가지 제시되었는데요, 대표적인 경로가 자원이 사회경제적 제도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겁니다. 그냥 땅만 잘 파서 자원을 개발하면 평생 부족함이 없이 먹고살 수 있으니, 굳이 애써서 뭔가를 배우거나 혁신을 추구하는 등의 노력을 하지 않게 되고 결국 다른 나라보다 뒤처지게 된다는 거죠. 또한, 자원개발의 이권이 권력자나 왕족 등 소수의 특권층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유지를 위해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부패한 정부가 들어서기 쉽다는 점도 언급됩니다. 소수의 특권층은 자신들의 권력유지에만 힘쓸 뿐, 국가발전이나 국민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는 건데요. 오히려 자원개발 이권을 둘러싸고 갈등과 반목, 심지어 전쟁까지도 발생해 대다수의 국민들은 저주받은 환경에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더라도 천연자원이 경제를 망칠 수 있는 경로도 제시되었는데요, 이를 네덜란드 병이라고 묘사합니다. 네덜란드는 1959년 북해에서 가스전을 발견한 뒤, 가스 수출로 막대한 외화수입을 올리며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외화유입으로 네덜란드 길더화의 가치가 상승했고, 자원산업의 인력채용 급증은 임금과 물가상승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제조업의 수출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결국 네덜란드는 1960~1970년대에 극심한 경제 침체를 겪게 되는데요. 자원이 거시경제에 충격을 주어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킨 셈이죠. 한편, 자원가격은 국제 자원시장에서 결정되어 개별 생산국이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데다 변동성도 큰 편인데요. 때문에 자원부국은 자원 판매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안정적이지 못해 경제가 취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정부 예산의 대부분을 자원 판매 수익에 의존하는 국가는 자원 가격 폭락 시 각종 공공개발사업이나 사회보장정책을 추진하는데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외부채 의존도가 높아지는 등의 부작용을 경험하기도 하죠.
그러나 최근에는 자원의 저주가 과장되었거나 현실을 잘못 설명하고 있다는 반론들도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측은 우선, 비교시기를 문제 삼습니다. 산유국의 1960년대 중후반 이후의 경제성장률을 다른 신흥국의 동 시기 성장률과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거죠. 대부분의 산유국들은 1950년대 이전에 상업적인 자원 채굴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상당 정도의 경제발전이 이뤄진 뒤이고, 1970년대 이후에는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경제성장률이 예전보다 낮아지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겁니다. 반대로 한국, 대만 등의 신흥국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본격적인 경제성장이 이뤄졌기 때문에 초기단계의 고도성장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동일한 시기를 비교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건데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은 뒤, 1인당 GDP 수준을 비교하면 자원부국은 유사한 사회경제 및 지리적 특성을 가진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소득 수준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도 있습니다. 좋은 제도를 갖춘 국가는 천연자원으로부터의 혜택이 상대적으로 작고 자원이 없더라도 부유해졌을 테지만, 제도발전이 열악한 국가는 자원이 없었더라면 가난한 상태를 면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이런 연구들의 핵심 논거입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는 석유가 있든 없든 부유했을 테지만, 쿠웨이트는 석유 없이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설명이죠. 또 다른 반론은 자원의 저주를 주장하는 측의 논리와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반대라는 지적입니다. 즉, 자원수출이 많은 국가가 나쁜 정책을 펼쳐서 경제가 안 좋아지는 게 아니라, 분쟁이나 잘못된 정책 등이 해외투자자와 제조공장을 내쫓아 경제를 피폐하게 하고, 결국은 자원개발업만 남아서 그 경제의 자원의존도를 높이게 된다는 설명이죠.
천연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인류의 삶과 경제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원의 저주" 이론이나 이에 대한 반론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부분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원이 적고 많고의 차이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현명하게 활용하느냐라는 것이죠. 경제와 사회의 수준을 높이는 데 있어 환경적인 요인을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축복을 저주로 만드는 것도, 저주를 축복으로 만드는 것도 우리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